서평-방우달시단상수필집/200510
삶의
지혜와 향기를 풀어내는 술사
-방우달
시인의 다섯권의 시 단상 수필의집-
최
원 현
울림을
위하여 - 미명의 아침에
문학은
비어있는 공간을 찾아 울림을 시도하는 행위다.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수필가는 수필로 비어있는 공간을 찾아내어 그 비어있는 공간의
중심에 자기의 호흡을 담아 자기 나름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울림이 먹혀들지 않는 때, 누군가 그 울림을 막고 있는 것이다. 50대 이상의 여러분은 기억 하실 거다. 기와 가루에 지푸라기 수세미로
닦아내던 놋그릇들, 눈이 부시게 닦여진 그 놋대야를 젓가락 끝으로 살짝 때리면 울려나던 청아한 소리, 그 긴 소리의 여운, 그런데 그걸 손으로
잡아버리면 울림은 죽고 만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그런 울림을 모를 거다. 그건 자연한 울림이었다. 티하나 없이 맑게 잘 닦여야 가장 맑은 소리를 냈다. 그건 악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울림은 악기소리보다도 더 고왔다. 살아있는 삶의 소리였다.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런데 그는 시인 같지 않다. 그래서 그는 더욱 시인이다. 그의 시는 악기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놋대야 소리다. 그런데 그게
어찌나 맑고 정겨운지 모른다. 방우달의 시와 단상 그의 산문들은 그렇게 청아한 소리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시인
방우달
방우달은
행정학을 전공했고, 행정을 하는 현직 공무원이다. 그런데 그에게선 전혀 세련됨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세련됨이란 직업에서 오는
경직됨이나 인상에서 오는 어떤 부담감이나 제 잘난 멋의 도도함 같은 것이다. 그저 수더분한 우리의 이웃으로 금방 친숙해질 만큼 만만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만만치 않다. 속이 너무 꽉 찬 사람? 아니다. 그는 쉴새 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은 기발하고
유쾌하다. 가슴이 짜르르 하게 웃음기를 일으키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섬뜩케 하여 그의 눈을 피하게 한다. 그냥 하는 말 같은데 그 속에 뼈가
있고 그 뼈 속에도 또 뼈가 있다. 그래서 무서워지기도 한다. 그의 실체, 그의 본 모습을 가늠키가 어렵다.
이번에
그는 또 일을 냈다. 언제고 일 낼 사람이었다. 이미 그는 여러 번 일을 냈었다. 휴화산 같은 사람이다. 그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는 이미 시집으로 <보리꽃> <전하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아니 되옵니다> <테헤란로의 이슬>
<알을 낳는 나그네> <나는 아침마다 다림질 된다>를 비롯하여 교과서에 없는 처세학이란 이름으로 <지갑을 던지는
나무>를 낸 바 있는데 이번에 또 ‘삶의 지혜와 향기로 지은 시.단상.수필의 집’이란 이름으로 <작은 숲 큰 행복>
<그늘에서도 그을린다> <아름다운 바보> <누워서 인생을 보다> <풍선 플러스> 등 무려 다섯 권을
한꺼번에 내버린 것이다.
그의
글(시와 산문)에서는 놋대접의 청아한 울림이 난다. 악기로 내는 소리가 아닌 삶의 가슴으로 내는 놋대접의 울림소리다.
그는
뛰어난 직관의 소유자다. 무엇 하나 예사로 보지 않는다. 그 예사롭지 않은 눈은 정신적 위기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해법을 찾는다. 따뜻한
가슴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을 향한 성찰로부터 시작하여 회복을 향한 나래짓을 쉬지 않는다. 그의 내재된 시 정신은 서정성이지만 삶이라는
현실을 서정의 바탕위에 서정으로만 담지 않고 가슴에 짜르르 전율이 일게 하는 깨달음의 카타르시스로 독특한 시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재미있게 읽다가 흠칫 전율을 하게 한다.
그의
시는 아주 자연스럽다. 그의 삶이 그대로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인간 존엄에 대한 회의와 반성과 날카로운 지적으로 스스로를
질책하며 현실의 모순과 시대적 갈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詩는/밥이
아니다/詩는 헐벗은 이를 덮는/이불이다/詩는/먹을수록/시장 끼를 더해주지만/詩는/덮으면 따뜻하다/詩人은/밥 짓는 사람이 아니다/詩人은/헐벗고
굶주린/영혼의 이불을 짜는 사람이다/詩人은, 그래서/배가 고프고 춥다('시와 시인' 전문)
詩는
늘 나를 가난하게 했지만/나는 나의 대책 없는 삶을 사랑했다 ('한가위'중에서)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고 한다. 시는 밥이 아니고 이불이고 그래서 시인도 춥고 배고프단다. 이불은 덮어주는 것이지 덮이는 것이 아니듯 시인도 덮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늘 안타까움이다. 그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가 진정으로 세상을 덮어주고 그래서 인간의 체온이 제대로
유지되고 정상적인 삶이 모두에게 이뤄지길 바란다.
그는
<시 따로 사람 따로>에서 시와 사람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시는 삶이고 사랑이다. 그래서 그가 존재해야 할 이유다. 한
잔의 술로 목을 축이듯 그는 시로 마음을 축인다. 그냥은 바라볼 수 없는 세상을 취한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다. 그렇다고 그의 정신조차 취한 건
아니다. 그냥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마시는 술처럼 그는 그렇게 시를 마시고 시를 쓴다.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다. 수필가, 소설가, 평론가, 미술가, 건축가, 공예가, 음악가, 작곡가 등 숱한 이름들이 '가(家)'를 붙이는데 비해 시를
쓰는 사람은 왜 '인(人)'을 붙일까?
그는
참 의문이 많은 사람이다. 한참 말을 배우는 아이의 질문처럼 의문이 많다. 그가 순수함이다. 아이처럼 순수함이다. 그러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맘에 들리 없다. 사람다운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원천적인 기대감마저 무너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집에 산다. 즉 집에서 핵이 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본질이다. 그만큼 시인이란 책임이 무겁다. 시와 사람이 같다고 해서 시인이다. 그런데
시와 사람이 같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다. 그는 시인이 아니다.
그가
꿈꾸는 시인, 그가 알고 있는 시인은 시와 사람이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같지 않은 사람이 보인다. 그래서 슬프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 시와 인이 같지 않아도 좋은 시는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너무 초월해 있으므로) 예외인
경우이다.
진실은
언제고 진실이다. 좋아 보이는 것의 실체도 진실이 아니면 금방 싫증난다. 진실은 진실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시인은 첫째도 둘째도 진실해야
한다. 그래야 시인이고 그래야 시가 된다.
시인은
언행일치는 기본이고 지행일치가 반드시 되어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향기가 좋고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물론 나는 시인이라기엔 많이
부끄럽다. '시 따로 사람 따로'인지도 모른다. 일치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리.
그의
자성은 늘 그렇게 자신을 다듬고 고치는 데로 돌아온다. 세상을 보다가 그렇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보다가 저러면 안 되는데 하다가 결국 나로
돌아오고 만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삶의 울림이 된다. 놋그릇의 청아한 울림이 된다. 싫증나지 않는, 부담 없는 울림이 된다. 그 울림에 읽는
이가 동화되고 공감한다.
그는
<나는 장애인입니다>에서
‘맹자(盲者)가
보는 세상은/티 없이 영롱합니다/농자(聾者)가 듣는 세상은/소음이 전혀 없습니다/아자(啞者)가 말하는 세상은/진실이 살아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세상이 차라리 맑고 조용하고 진실하다고 말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 듣고 싶지 않은 것, 차라리 침묵했으면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 그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스스로가 장애인이 되고자 한다. 아니 장애인이 되어 차라리 못보고 못 듣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소경도
아니고 귀머거리도 아니고/벙어리도 아닌 나는/참 세상을/볼 줄, 들을 줄, 말할 줄 모르는/부끄러운 장애인입니다/
아니
그렇게 소경이고 벙어리고 귀머거리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면서 제대로 볼 줄도 들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부끄러운 장애인인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한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자기 몫을 하고자 하는 책임감이다.
방우달의
글들에선 그런 세상을 향한 사랑이 아프게 넘쳐난다. 견딜 수 없이 안타까워하면서 그것들을 슬픈 눈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초월의 눈,
극복의 눈, 새로운 경지로 바라보면서 시원하게 막힌 것들을 뚫어준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의
대중탕론(‘대중탕에서
만난 벌거숭이 개똥철학’ 중)을
보면
모두가
벗은 대중탕에 나는 있다-누가 누군지 모르는 익명의 바다다-있으나 서로 알지 못한다.
대중탕에선
목에 힘주는 사람도 없다-모두가 벗는 사람 앞에선 부끄러운 것도 위장할 것도 없다-모두가 같다.
나는
아이의 등을 밀고 아이는 내 등을 밀고 있다-미안하다-서로 등을 밀어줄 피붙이 하나 없는 사람-그들은 얼마나 부러워할까.
대중탕을
나설 때 꼭 잊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모든 사람이 눈치 보지 않게 벗고 살고 싶다-모두가 벗고 보면 잘난 인생이 한낱 도토리 키 재기인
것을.
그는
그가 가진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가진 것임에도 그것마저 가지지 못 한 자에 대해 심히 미안해한다. 그들에게 자신의 가진 것을 내어주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그가 믿는 것이 하나 있다. 세상은 아니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특별히 잘 난 사람은 없다는 그만의 믿음이다. 저
혼자 잘난 체 할 분이지 실은 조금도 잘난 게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교만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평범한 이들과 어개높이 눈높이를 같이
하고자 함이다.
방우달이
펴낸 시.단상.수필의 집 다섯 권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내 삶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부끄럽지 않은지를 인도하는 삶의
지침서이다.
그가
펴낸 다섯 권의 글들이 얼마큼이나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 이불이 되어주고 밥이 되어줄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책무 곧 이불과 밥을 자신보다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 내놓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도 그는 참 사람답다. 그만의 소리로 그만이 울리는 놋대접 소리,
그래서 나는 그의 시를, 그의 시가 울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그의 눈이 언제까지고 그렇게 맑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