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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달 세 번째 시집 <테헤란로의 이슬> 사람들은 시인을 부러워한다. 시인은 보통사람이 못하는 '시(詩)'라는 것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집을 사고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고 보통사람인 독자들이다. 헌데 그런 시가 시의 수요자인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 어렵고, 때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때도 있다. 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알고있는 보통 사람들에겐 시의 정서가 자신들을 잠기게 할 만큼의 깊은 강은 되어야 시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우달 시인은 시의 수요자에게 매우 자상하다. 그렇다고 독자를 의식하고 시를 쓴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작(詩作)에 지극히 충실하면서 자기 스스로가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독자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그의 시는 다른 독자와도 쉽게 가까워 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적 분위기는 시를 잘 모르는 사람까지도 이내 그의 시적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그의 시는 세상을 온통 짙은 까망색 한가지로 만들어 버리곤 강물 속에 잠기듯 독자를 그 안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그가 펼쳐놓은 까망 속에 잠겨 있으면 그의 시가 품어내는 냄새가 솔솔 품겨나고 그 냄새를 통해 독자는 그의 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짐작한다. 그와 독자는 함께 길들여진다. 대개의 시인들이 자신들 시의 강에 다분히 의도적으로 독자만을 잠기게 하려 하고 시인은 관찰자가 되려 하지만 방우달은 시가 독자에게 다가와 잠기게 한다. 그렇게 그가 펼쳐 놓은 까망은 강에서 바다가 되고, 그 까망의 바다를 방우달은 '무덤'이라 부른다. <테헤란로의 이슬>은 <보리꽃>, <전하,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아니되옵니다>에 이어 내놓는 방우달 시인의 제3시집으로 무덤을 주제로 한 연작 시집이다. 특히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미발표작만으로 무려 86편이다. 그는 여는 말에서 미발표작을 시집으로 묶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현실이 슬프고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도전적인 작업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대로 무덤에 꽃이 피고, 거기서 피인 꽃잎에 영혼이 이슬방울처럼 영롱하게 맺힌다면 그보다 더 아름답고 값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그 모습을 젖은 청초함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시들을 '무덤에 핀 꽃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손수 밤새워 정성스레 만든 '꽃다발'로 바친다고 했다. 그것도 머리와 마음을 함께 숙여 바친다고 했다. 시인이 독자를 위하여 마련한 선물 보따리를 열었을때 독자는 그것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고, 또 그것이 자신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란 걸 알게 될 때의 감격과 충격을 상상해 보라. 방우달은 그가 시인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스런 베품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래서 독자에게 나아가는 방법을 바꾼다. 세번째의 시집만큼은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것으로 독자들과의 첫 만남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독으로 독자에게 나아가고 찾아가 순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독자앞에 서서 그들의 가슴 문을 열어보고 싶었다. 결국 시의 주인은 생산자인 시인이 아니라 영원한 소유자가 되어야 할 독자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그만의 아름다운 결단인 것이다. 이 시대에는 유난히 시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도 왜 '시인'을 발견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어쩌면 현대는 시보다 시인을 더 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활자화된 시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에 안으로 담겨 있는 시, 그래서 그 시가 활자화의 과정을 거쳐서가 아니라 시인의 눈빛, 시인의 손길을 통해 직접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감동 곧 '느낌의 시'를 원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시집 <테헤란로의 이슬>에서 한 '시인'을 발견한다. 평상시 필자가 아는 그에게선 전혀 시인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는 하나같이 겸손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날카롭게 반짝이며 빛나는 눈이 아니라 부시지 않을만큼 눈을 뜨고 조심스레 바라보는 눈이고, 목소리도 한 옥타브의 반쯤은 내린 상태로 독백처럼 시를 풀어 놓는다. 몰라, 몰라, 몰라 / IMF! / 너도 나도 // 금융,/ 죄악,/ 영혼, // 구제의 길 / 얼마나 / 멀까. // 밥풀 하나가 / 건장한 / 사나이를 꿇어 앉힌다 // (중략) 밥풀 하나에 / 허약한 / 사나이가 일어선다. // (하략) <실직 -무덤39- 중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요란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먼저 자신이 초연해 지며 자신의 모습부터 겸허히 돌아본다. 그런데도 방우달의 시는 읽는 이의 간장을 태운다.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쉽게 쓴 시인데도, 여느 시보다도 강하게 가슴으로 파고 든다. 우물우물 혼자 속엣말을 하는 것 같은데 온갖 신경을 그쪽으로 끌어 모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시인은 모든 것을 '무덤'으로 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 해답은 쉽게 풀린다. 마을 뒷산 / 땀 흘리지 않고 오르듯 // 무덤으로 가는 길은 / 늘 그렇게 펼쳐져 있다 / 남녀노소 통행료가 없고 / 노잣돈을 쓸 휴게소도 없다. // 일방통행만 허용되는 / 엄숙하고 낯선 길이다. // 친숙한 노래소리 끊이지 않는 / 누구나 찾아가는 한적한 길이다. // 길가엔 / 꽃들이 질서있게 놓여있다. // <무덤으로 가는 길-무덤29- 전문> 몰랐어 /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무덤 속이고 / 내가 놀고 있는 곳이 무덤가인 것을 // <절망 -무덤58- 중에서> 이 세상에 길이 없다 / 막막하다. // 무덤에 이르는 길. // 이 세상을 열어놓는 / 훌륭한 길이다. // <길-무덤77- 전문> 그가 보아온 세상은 그가 생각했던 세상은 아니었다. 그의 첫번째 시집 제목인 <보리꽃>이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는 강인한 삶에의 의욕과 굴하지 않는 의지였다. 그것이 시인에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지명(知命)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른 지금 시인은 삶 자체를 무덤으로 가는 길로 보고 있으며, 그것은 특별한 길이 아니라 누구나,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땀도 흘리지 않고 마을 뒷산을 오르듯 가는 길이라고 한다 . 어쩌면 삶의 성숙이나 달관처럼도 보일 수 있겠으나 시인의 '세상보기'의 눈이 달라진 것이다. 순리란 내가 수용했을 때 가능한 것이란 깨달음이 새로운 시의 세계를 발견케 되었고, 그 시의 세계는 방우달만의 시적 감성으로 싹을 틔고 꽃을 피웠다가 열매를 맺기까지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방우달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간과 시간에서 꽃을 피웠고, 사람들에겐 열매만으로 보여졌던 것이다. 그에게 꽃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하는 아픔의 과정으로서 존재했던 것이고, 그렇기에 그의 '세상보기'는 새로운 각도에서 그의 시작(詩作) 세계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무덤'은 방우달이 50년 가까운 지금껏 살아온 삶 속에서 찾아낸 가장 성숙한 발견일 수 있다. 그래서 그곳(무덤)으로 가는 길이 그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도 친숙하여 노래하며 가는 길이고, 꽃들까지 질서있게 피어있는 꽃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 살고있는 곳이 무덤 속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평안함을 얻을 수 있었고, 삶의 의미 또한 보다 분명히 알게 된 것 같다. 무덤가는 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봉분에서 미끄럼도 타고 잔디에서 씨름도 레스링도 하는 외롭지 않은 아이들이 외로운 어른들을 위로해 드립니다. 서로가 무덤가에서 외로움을 달랩니다. <놀이터-무덤28- 전문> 방우달의 시는 이처럼 무덤을 통하여 어른과 아이들, 곧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무덤'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회복을 소리없이 외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욕심을 버리라는 메시지요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류수'(지구가 생성될 때부터 바위 속에 갇혀있게 된 물)를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가장 깨끗한 무덤으로 보면서도 가장 답답하고 어두운 무덤으로 보듯 세상과 격리된 삶보단, 더럽고 악해져 있더라도 순화 시키고, 회복시켜 나갈 수 있는 막혀있지 않는 현실이 소중하다는 역설을 펴기도 한다. 그는 시 '단풍놀이', '무덤놀이', '곤충채집'에서처럼 몸부림치며 울기도 하고, 우는 흉내를 내보기도 하며 보다 삶-무덤- 가까이 있으려 한다. 그는 무덤은 종착역이라 말하며 '영원한/지하의 내 집을 짓기 위해/지상의 하루를 열심히 삽니다/'로 어차피 인생은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이고, 삶은 '무덤을 파는 행위' 라고 하지만 무덤은 '살아있는 자의 영혼을 따뜻하게 눕히는 요람'이라며 갈등 속에서 결론을 내린다. 방우달의 무덤은 진한 검정색이지만 절망으로 표현되는 어둠은 아니다. 오히려 진한 검정색이 거울이 되어 투영되는 '나'를 보게 한다. 종착역이되 그곳으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을 여는 시작의 역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무덤 속이 아닌 내 생활이 없으므로'(두더지-무덤46-중) 구태여 무덤의 생활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필자가 알기로 그는 요즘 보기 드문 참 괜찮은 공무원이다. 할 일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그러면서 꾀를 부리거나 눈 속이지 않고 그가 전혀 시인티가 나지 않는 시인인 것처럼, 공무원 티가 나지 않는 공무원으로 늘 충실하다. 그에겐 필요 이상으로 가질 수 없음도 안다. 없어도 될 것은 아예 없다. 보석을 묻어두고 돈을 모아놓고 살아갈 형편이 못됩니다. 맘껏 뒤져 보시고 아무것도 없더라도 내 빈 집을 진심으로 용서 바랍니다. 열심히 살아온 집입니다. <휴가-무덤56- 전문> 그의 시처럼 그는 가질 것만 갖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조금의 불평도 없이 열심히 해내는 일의 사람이다. 허리에는 호출기를, 주머니엔 핸드폰을 그리고 언제든 밤을 새울 준비를 하고 있는 강남의 상당히 잘 사는 사람과 상대적으로 못 사는 사람이 한 집에 사는 꽤 큰 동네의 책임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도 보통사람 냄새를 짙게 풍기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민감한 고발성 사회현상 마저도 그만의 독특한 시법으로 거슬리지 않게 풀어버리곤 한다. 그것도 아주 시원스레 풀어버린다. 생각을 많이 하게는 하지만 계속 고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그래' 고개를 두 번만 끄덕이면 이해가 되고 답답하던 속까지도 풀리는 그만의 시법에서 독자는 이내 그를 사랑하고 만다. 그것도 그럴것이 방우달은 독자보다 한 걸음 앞서서 독자가 생각하고 있는, 곧 독자가 하고싶어 하는 말을 그의 시로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가 잘 살아 / 천수답을 내팽개쳤는가. / 천수답이 사라진 우리의 마음이 / 가뭄에 탁탁 갈라지지 않았는지 // <천수답 -무덤42- 중에서> 목숨값이 너무나 헐하여 / 지천으로 널려있는 // <오징어 -무덤40- 중에서> 멀리 떠나온 / 황토방이 그립다. / 그리운 것은 비싸다. // <황토방 -무덤64- 중에서> 지하방에 이부자리를 깐 사람은 죽어서도 폭우가 무섭다. <폭우 -무덤54- 중에서> 그가 보는 삶은 겉으로만 보이는 삶이 아니다. 시골과 도시를 막론하고 그의 눈은 삶의 모습중에서도 아픔의 부분을 정확하게 투시한다. 그런 시인이기에 죽음이 종결 의미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다가오게 하고, 밤의 개념도 끝남이 아니라 열림을 준비하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개념으로 까망을 이해하게 한다. 무덤! 그것은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간에 거역할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질서일지도 모른다. 방우달은 일찍부터 그것을 알아버렸다. 그의 연작시가 86편에서 끝날지 더 이어질지는 시인 자신도,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 늘 어둡고 칙칙한 의미로만 다가오던 '무덤' 이란 이미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여 까망이 어둠이 아니라는 단호한 외침을 망설이지 않게 한 시인의 의도에 박수를 보낸다. 무덤에는 죽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일반적이고 편협된 사고의 골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이 바로 무덤이며, 무덤은 언젠가 죽을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시인의 주관엔 다소 무리가 있다 할 수도 있으나 삶과 죽음, 그것은 숨을 쉬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구분일 뿐인데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다 하여도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그 또한 살아있는 자가 아닌 채 무덤 속에 들어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절망이란 말을 너무 쉽게 하곤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 '재기'니 '회복'이니 하는 말 또한 거침없이 해댄다. 방우달 시인은 그런 우리에게, 그런 이 시대에 엄숙하게, 그러나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마치 동물원에 가서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동물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우리 안에서 역시 자기들처럼 우리에 갇혀있는 사람들로 보며 즐기는 동물들과 같이 어떻게든 무덤에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현대인에게 방우달은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보라고 깨우친다. 하지만 시집의 뒷쪽으로 가면서 시인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린다. 시인도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그를 시인으로 보다는 생활인으로 요구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겐 결코 타협은 없다. 여기서는, / 잘만 하면 앉아서 갈 수도 있고요. / 빈부귀천이 바뀔 수도 있고요. /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만 / 절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 <환승역-무덤82- 중에서> 살다보면 묻히겠지만 / 가끔 어둠의 틈새를 뚫는 / 한줄기 빛 때문에 // 빛은 어떤 빛이라도 좋았다. // <삶-무덤84-중에서.> 시인도 돈이 있어야 건강할 수 있고 / 건강해야 오랫동안 잘 시를 쓸 수 있겠다. // (중략) 시인도 돈이 있어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겠다. / 마음도 풀 수 있겠다. // <돌아오는 길에 버리지 못하고 -무덤85- 중에서> 그는 좀처럼 눈물을 밖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늘 속으로만 우는 버릇이 있나보다. 그는 제3시집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이 무덤 속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어둡고 답답하고 축축하고 악취와 독가스가 가득해도 아름답다고 살만 하다고 살아야 한다. 아무리 이 세상이 무덤 같더라도 모진 생명이 숨 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살아야 할 신성의 의무가 있다. <일상-무덤86- 전문.> 그렇다.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몫은 세상에 희망을 심는 일일 것이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새롭게 삶의 의미를 도출해 내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 희망을 심고 빛의 싹을 틔우는 일, 그것도 시인의 몫이리라. 방우달 시인은 그런 몫 외에도 또 다른 사명자가 되고자 한다. 곧 가장 두려움을 갖는 생의 종착역 문제, 죽음 이후의 일을 그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의도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현대인들에게 아니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는 이미 그것들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안타깝게 말하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면 삶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도 말하려 한다. 덕지덕지 몸에 붙어있는 삶의 군더더기들을 생각 하나로 바꿀 수 있다고, 그래 아름답다고, 살만하다고 생각만 하면 세상은 살만 해 진다고 말한다. 방우달의 시집 <테헤란로의 이슬>은 그래서 두렵지도 무섭지도 어둡지도 않은 무덤의 시들이다. 누구나가 한 번은 가야하는 곳이지만 미리 그곳에 가있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편안해 지는 곳, 곧 나와 우리 모두가 함께 가야 할 참으로 신성한 곳으로 그는 느끼게 하고 있다. 테헤란로가 개통된지 만 21년이 되는 날인 1998년 6월 27일에 이 시집이 나오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참으로 의미있는 일인것 같다. 테헤란로 중앙 분리대의 풀잎들은 검은 먼지막 때문에 이슬이 풀잎을 포옹해도 이슬의 가슴과 풀잎의 가슴은 서로 닿을 수 없단다. 풀잎도 어쩌지 못하고, 이슬도 어쩌지 못하는 슬픔속에 제 생각과 분리된 채 예까지 살아온 또 하나의 아픔으로 감내하면서도 독자들에게는 가장 신선한 것으로만 선보이고 싶어하는 고운 마음이니 방우달 시인이야말로 시를 통하여 무덤과 같은 오늘 이 시대에 희망과 빛의 길목을 찾아가는 참으로 귀한 수도자가 아닐까싶다. 그러나 필자가 서두에서 말했듯 독자가 시집 한 권을 사고, 시 한 편을 읽는 것은 그 시인의, 시의 강에 독자가 잠기는 것이고, 곧 시의 문화를 몸에, 가슴에 입는 것이다. 들어갔다 이내 나와 버리는, 이를테면 유입이 안되는 것은 시인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시를 한 영역으로 구축하는 시의 수도자이기에 앞서 때로는 빛을, 때로는 향기를, 때로는 진한 아픔이나 슬픔까지도 독자에게 전염시키므로써 시의 문화는 확대 될 수 있을 것이다. 방우달은 그런면에서 시의 수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시의 전도자로서의 몫도 잘 감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시원스레 뚫린 테헤란로의 그 너른 길만 보는 이 시대인들에게 아무도 눈여겨 봐 주지 않는 길가 풀잎에 내려앉은 먼지막으로 인해 이슬이 풀잎의 살갗 감촉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 참으로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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