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가를 조용히 간지럽히고
방우달(시인)
초가을 햇볕을 쬐며
후평동 효자동 옛골목길을 걷네
감나무 대추나무는
주렁주렁 열매를 익히고
쪼그리고 앉은 분꽃은
까만 씨를 말려 보관했다가
내년에 대를 이으려고 하네
아내와 나는 귀중한 씨 몇 개만 달라고
분꽃에게 졸라서 얻어와
아파트 베란다에 놀러온 볕에게
잘 말려 달라 신세 한 번 졌네
며칠 후 시집 간 큰 딸이 세 살 짜리 아들과
고추 잠자리 잡으러 근린 공원으로 나왔는데
잠자리는 뵈지 않고
까만 분꽃 씨앗을 보더니
아들이 곱게 따서
하나 하나 제 엄마에게 준다고
춘천 제 엄마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네
거실에서 햇볕을 즐기던 나는
큰 우주 속의 작은 분꽃 씨 하나 만지작거리며
대물림의 신비를 캐고 또 묻고 있었는데그 때 초가을 신선한 한 점 바람이
내 입가를 조용히 간지럽히고 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