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어느 화물차 운전사 이야기
▶ “…♪눈물 먹고 목숨 걸고 힘들어도 털고 일어나, 이러다 쓰러지면 어쩌나, 아빠는 슈퍼맨이야 얘들아 걱정 마, 위에서 짓눌러도 티 낼 수도 없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와도 피할 수 없네, 무섭네 세상 도망가고 싶네, 젠장 그래도 참고 있네, 맨날 아무것도 모른 채 내 품에서 뒹굴거리는 새끼들의 장난 때문에 나는 산다, 힘들어도 간다 여보 얘들아 아빠 출근한다….” 가족들을 위해, 장거리 운전에 나선 아버지의 외로운 차 안에 이 노래를 띄워드립니다.
집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슬픈 이사를 했다
새집엔 장롱 자리가 없다
고3 책상엔 의자가 없다
두 아이는 기숙사·자취방
장거리를 뛰는 아빠는
일주일에 한번 귀가한다
다시 모여 살 날은 정말 올까
김용한(가명·53)씨는 대전에서 태어나 공고를 졸업하고 19살부터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엔진오일 기름때를 솔벤트로 씻어내 손이 갈라지고 여름이면 진물이 나곤 했다. 열심히 배운다고 배워도 툭하면 스패너로 머리를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기름밥’이 지긋지긋한 그는 하얀 장갑을 끼고 있던 ‘기사님’이 너무나 부러웠다. 정비를 배우기 시작한 지 2년 만인 1980년, 그는 단골로 정비공장에 들르던 화물차 기사의 소개로 꿈에 그리던 운수업체에 입사하게 됐다. 화물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막바로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었다. 조수석에만 앉아 있기를 2년여, 1982년 드디어 꿈꾸던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쯤 지금의 아내와 맞선을 봤다.
“얼굴도 하얗고 참 고왔습니다.” 수줍은 만남이 이어졌고 서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물차 기사로 전국을 떠돌다 보니, 일주일에 얼굴 볼 수 있는 기회도 한두차례 정도뿐이었다. 연애가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김씨와 그의 아내는 서둘러 결혼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어서 제가 좀 서둘렀죠.” 김씨가 웃으며 말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은 안정돼 갔다. 기사 월급을 착실히 모아 1989년 화물차를 살 수 있었다. 돈도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경유값이 리터당 3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일감이 많다는 인천으로 이사와 1억500만원짜리 연립주택으로 내 집 마련도 했다. 그사이 세 아이도 태어났다. 날로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장거리 운행도 자제했다. 남부러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차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운임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경유값이 꿈틀댔다. 세 아이 키우기에도 허덕대던 아내가 일을 나갔다. 김씨도 가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다시금 운임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부산과 수도권을 왕복하는 ‘따당’을 뛰어야 했다. 월요일 새벽에 인천항에 나가 컨테이너를 싣고 부산·경주 등지에 내려주고, 또다른 컨테이너를 싣고 인천·고양 등지로 돌아오는 일이다. 이렇게 일주일을 꼬박 일하고 토요일 새벽에나 집에 돌아가는 삶이 반복됐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뜸해졌다.
죽을 듯 운전만 해도 살림은 쪼그라들었다. 아이들 학비에 차량 유지비, 기본적인 생활비도 충당이 안 돼 빚만 늘어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카드 3개를 돌려막고, 화물차를 담보로 캐피털 대출을 받고, 제2금융권에도 손을 벌렸다. 이대로는 가족들이 모두 길거리에 나앉는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닥쳐왔다. 다행히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2009년 결국 김씨는 돈을 벌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분가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장남은 직장 기숙사에 둘째 딸은 직장 동료 선배와 함께 자취를 한다. ‘이산가족’이 된 셈이다.
그리고 지난해 5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1억500만원에 샀던 연립주택을 18년 만에 팔아 1억2000만원을 손에 쥐었다. 5000만원 정도로 급한 빚을 갚은 뒤 3000만원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좁은 부엌에 방 2개, 수돗물을 쓰려면 베란다에 있는 개별 모터를 돌려야 하는, 30년 넘은 13평짜리 아파트였다. 집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 웬만한 세간은 버려야 했다. 이 가슴 아픈 이사조차도 아내에게만 맡겨야 했다. 운행을 거부하면 ‘괘씸죄’에 걸려 물류회사에서 일감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이삿날에도 컨테이너를 싣고 부산엘 다녀왔다.
삶이 팍팍해지자 가족들도 지쳐갔다. 예민한 막내딸은 일주일에 하루나 마주치는 아빠를 보고도 말을 걸지 않는다. 김씨가 기억하는 딸의 마지막 목소리는 “학원이라도 한번 보내준 적 있냐”였다. 아내는 고3 수험생 뒷바라지와 고된 일에 지쳐 툭하면 짜증을 낸다. 김씨도 김씨대로 고생하다 돌아온 집이 불편해 못 견딜 지경에 이르렀다. 이사 직후 부부싸움에서는 “이럴 거면 갈라서자”는 말까지 나왔다. “장롱은 버리고 왔느냐”는 질문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대거리가 돌아왔고, 결국 ‘같이 사네 마네’ 하는 지경까지 갔던 것이다. 이삿날에도 곁을 안 지킨 남편에 대한 섭섭함이 가득해 보였다.
“그 주에는 운전석으로 돌아온 월요일이 오히려 편하더라고요.” 김씨가 말했다. 그는 그 주 내내 동료 기사들과 무전기로 이 문제를 상의했다. 처음에는 ‘힘들게 일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가족에 대한 험담이 먼저였다. 그런데 동료 기사들의 가족 상황을 듣다 보니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이혼한 다른 기사는 “일주일 내내 노숙자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주말에도 혼자 라면이나 끓여 먹을 작정이냐”며 “그나마 가족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고 충고해줬다.
그러고 보니 막내딸이 좁아터진 방에서 울고 있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책상에 의자도 놓을 수 없는 좁은 방 안에서 막내딸은 침대에 앉은 채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정리하다 만 듯 흩어진 옷가지를 보니, 옷장도 못 놓는 새집이 서러웠던 모양이었다.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어 조용히 뒤로 물러난 김씨는 혼자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날은 정말 내가 지금껏 잘못 살아와서 가족들이 이렇게 고통받는 건가 하는 마음뿐이었다.”
‘가족이 다시 모여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김씨는 일단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족마저 없으면 삶을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들어 화물차 운전석에 앉아 편지를 쓰는 버릇을 들였다. “아빠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가족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라도 전해야겠기에 편지를 써요.” 김씨가 말했다. 그의 1차 ‘공략’ 대상은 막내딸이다. 매주 월요일 새벽, 틈틈이 적은 편지를 화물차 주차장으로 나서는 길에 방문에 끼워놓고 온단다. 지금까지 어림잡아 15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아직 답장은 받지 못했다. 마침 오는 주말에는 둘째 딸이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를 가족들에게 소개하러 온다고 한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왁자지껄 저녁식사라도 할 모양이다. “분위기를 봐서 막내딸한테 ‘답장은 안 주느냐’고 물어볼 작정이에요.” 김씨가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