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혼詩魂

시의 산문화 경향과 해체시(펌)

野塔 방우달 시인 2010. 4. 27. 16:27

 

꽃다지 조회 56 | 09.09.28 15:24 http://cafe.daum.net/oakfriend/BA2i/22

<시의 산문화 경향과 해체시>

 

                                                               이 정 미

 

요즘은 소설에서도 시적 진술 즉 시다운 표현들이 더러 보인다. 소설 문장에서 가끔 발견하는 시적 표현이 있다.

 

“저 산이 기어이 비를 불러왔군요. 어두운 허공을 희끗희끗, 그리고 번들번들하게 잠식해 들어가는 덜 진화한 생물 같은 물체, 저것이 비군요.(중략) 안개가, 산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습니다. 안개의 손길에는, 비가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이나, 태양이 보내는 온정이나, 그런 것들이 깃들여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새벽 안개 사이로 담배 연기를 뿜으면, 그것들이 서로 스며들면서, 반갑게 한 몸이 되는 게 보입니다. 어떤 생물이, 저토록 서로 스며들어, 기쁘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김형경의 단편 <담배 피우는 여자>중에서)

 

이런 예는 소설 문장이라서 시적 형식과 압축미는 보이지 않지만 시적 감수성이 다분히 보인다. 상대적으로 최근 시에서도 산문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필이나 소설처럼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이버공간에서 발표되는 시들이 그러하다. 사이버 공간의 문학이 권위적 작가와 독자와의 경계를 허물기에 그만큼 일상적 체험이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일상적 체험을 고백하다보면 자연히 산문화가 된다. 이런 경향은 독자에게 보다 흥미 있게 패러디하게 접근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래 시란 산문과는 달리 섬세한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라서 시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그렇지만 디지털 시대라는 사회변화가 가져다 준 시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 우선 눈에 띄는 패턴은 시․공간의 명시(明示)와 시적 화자의 행위이다.

사이버 문학 공간에서 흔히 발표되는 시들을 살펴본다. 이들은 기성 작가들의 권위의식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미숙한 표현과의 경계를 과감히 없애고 자유롭게 구사한 작품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는 ‘시보다는 낙서 같다’라는 지적을 받는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시다운 기법을 살리며 감동을 주는 시가 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다./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하늘과 다리와/다리 위에 기대어/뿌리 내린 풀과/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작자 미상)

 

“액자에 담으면 세상은 아름답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이 말속에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삶이란 가지가지란 뜻도 녹아 있다.//죽음보다 깊은 아픔도 슬픔도 고독도/삶에는 찾아오고/(중략)/그래서 체험이 사람을 키우는 것 같다./(중략)/삶이란 단순하지가 않다./희로애락의 용광로이다./삶을 액자에 담을 수 있으려면/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고/한없이 절망하고 쉼 없이 눈물 흘러야 하며/끝없는 시련의 다리를 홀로 숱하게 건너야 하리/그래서 인간이 단련되고 성숙되어야 하리라. (방우달, <액자에 담아 삶을 걸어 놓고>에서)

 

“슬퍼도 웃는다/힘들어도 웃는다/그러나/죽을 만큼 슬프고 힘들면/단 한 번만 운다/그리고/다시 웃는다.”(작자 미상 <삶>)

 

인터넷 문화는 댓글달기의 자유로움과 검색을 통한 지식, 정보의 축적으로 웬만한 사람들에게 글쓰기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준 공적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일반 기성 시단에서 발생한 산문화 경향은 단순한 스토리 부여라는 흥미성을 넘어서 세태 반영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시적 감각으로 표상화하고 있다.

 

映畵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내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중략)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70년대만 해도 영화관에서는 영화 시작하기 전에 관람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애국가를 경청하는 순서를 의무화했었다. 시적 화자는 그런 강요된 애국심에 반발하는 마음을 애국가 화면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을숙도의 새들의 자유로운 비상 장면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끝 연의 ‘주저앉는다’는 정치권이라는 우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염원을 뜻한다.

시가 산문화되었다는 것은 형식 자체가 산문시라는 것은 분명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문시는 내용에서 산문 형식으로 묘사되었다는 뜻이다. 시의 산문화는 독자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는 장점 외에 어디까지만 새로운 기법 창조에 기여하면서 구체성과 시인 자신만의 현장성(now and here)을 강조한다. 대화체, 독백체, 인칭의 바꿈(삼인칭으로 묘사되던 시적 대상이 중간에 일인칭으로 바뀜) 등이 그 기법의 예이다.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중략)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중략)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 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의 <북어>에서---

 

여기서 ‘말의 변비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북어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억압되고 부자연스런 현실을 ‘밤의 식료품 가게’에 매달린 ‘북어’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해체시란 90년대부터 나온 시의 경향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철학사조에 영향을 받아 기존의 시다운 질서정연함을 완전 파괴한 것이다.

이승훈 시인의 설명에 의하면, 예를 들어 양말(洋襪)에는 중심이 없이 씨줄과 날줄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상호 보완하듯이 중심을 파괴하자는 주의가 바로 해체시라는 것이다. 매 끼니를 밥에다 된장찌개를 먹는 것이 종전의 시 경향이라면 아침 식사는 바게뜨와 커피로 하고 저녁에 된장찌개를 먹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것이요 해체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 안에 난데없이 한자나 숫자의 배열이 있는가 하면, 흔히 접하는 신문기사, 욕설, 옛 글자, 외국어 등의 인용이 있기도 하고, 특정한 시어들을 일부러 서로 다른 활자로 배열하는 등등 기괴한 실험기법이 나오는 시이다. 시인 황지우, 박남철(시집<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청하, 1982)에서)이 주로 이런 경향을 지녔다.

 

 사랑하는 그녀가 말했다.

 

“저, 통신에서 대화하다가 간혹 이상해질 때도 있으면

 통신 끊고 들어가서 ‘자위’......해요......“

 

 내가 담담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순간적으로; 너무나 환하다 싶은 말이었지만 ;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녹음 무성하고 햇살 환한 유월의 오후, 나는 그녀의

 그 말이 베란다 쪽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비 갠 뒤의, 햇살의, 장미의,

 햇살의, 말의 폭죽임을 이제 다시 알겠다.

 

 으하하하하하하하......[^^)))!][1999.6]

--- 박남철의 <진실>, 박남철시집 <제1분/ 2009,문학수첩>에서 ---

 

“비틀린 세상에 대해 나도 비틀린 시로 대응한다”(박남철)는 자세로 실험기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 외 메타시란 시 안에 또 다른 시(다른 시인의 것도 된다)를 인용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 진화한 경향이다. 이런 새로운 경향의 시는 전통적 시 읽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무척 생소하게 와 닿고 일부 독자들에겐 외면당하고 있지만 현대시의 한 경향으로 보아 넘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