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스크랩

40여년 만에 콘서트 여는 가수 이장희

野塔 방우달 시인 2013. 7. 17. 02:42

[유인경이 만난 사람]40여년 만에 콘서트 여는 가수 이장희

2013 02/05주간경향 1012호
ㆍ“세시봉 공연 때 노래 부르며 음악이 내 고향이란 것 깨달았죠”

수많은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니,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만나본 사람들 중 누가 가장 부럽습니까?”

치기어린 시절에는 부와 명예를 가진 이들이 부러웠다. 달력으로만 감상하는 명화의 진품을 수백점 소장하고, 상품의 가격표에 상관없이 물건을 고르는 부자들, 혹은 고위직에 오르거나 한비야씨처럼 오지에서 온몸을 던져 구호활동을 하는 이들을 선망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재벌들은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동물원’이란 말도 듣고, 고위직에 오르려면 혹독한 청문회를 거쳐도 곧 내려와야 하고, 아무리 칭송을 받는다 해도 한비야씨처럼 매일 전염병 예방주사를 맞고 죽어가는 이들을 보듬고 살고 싶진 않다.


요즘은 이장희씨(66)가 제일 부럽다. 한때 ‘그건 너’ 등의 노래로 청년문화를 이끌었고 대마초 파동 등 시련도 겪었지만 사업에 성공했고 ‘지공선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가 된 지금도 전세계를 여행하고 ‘울릉천국’이라고 이름 붙인 울릉도 집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누린다. 가수, 작사ㆍ작곡가, 음반제작자, 패션매장 주인, 카페, 라디오방송국 사장, 여행사 대표, 그리고 농부…. 그 숱한 직업도 규정하기 힘든 남자, 이장희씨는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 “크루즈를 타봐야지” 등 많은 이들이 꾸는 꿈들을 일상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2년 전 MBC TV의 ‘세시봉 콘서트’에 잠깐 출연한 후 그를 기억하는 팬들의 열정으로 특별 콘서트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3월 2일부터는 데뷔 42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도 갖는다. 콘서트 연습으로 바쁜 그를 서울 삼성동의 연습장에서 만났다. 그의 짜랑짜랑한 목소리나 기타줄을 퉁기는 힘은 40년 전 ‘그건 너’를 부르던 청년 이장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콧수염과 더벅머리는 사라지고 민머리 노인이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비음 섞인 독특한 목소리는 더 크고 강해졌다. 컴퓨터가 만든 요즘 아이돌의 노래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생목소리여서 더 신선했다.

콘서트는 40여년 만인데 지금 콘서트를 갖는 이유보다 그동안 하지 않은 이유가 더 궁금합니다.
“제가 1970년에 데뷔해 가수로 활동한 기간이 몇년 되지 않아요. 또 당시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이란 라디오프로그램 DJ로 매일 생방송을 하느라 무대에 서는 일도 드물었고 지방 콘서트는 생각도 못했지요. 미국으로 떠난 후에는 노래는커녕 기타 연주도 하지 않았고 무대 공포증도 있었어요. 1984년엔가, 조영남·송창식·김세환 등 옛 친구들이 LA에서 콘서트를 하면서 갑자기 저를 무대로 불러세웠어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라는데 첫 소절 이후에 갑자기 가사가 기억이 안 나는 겁니다. 분명 제가 작사작곡한 노래이고 수백 번 부른 노래인데요. 그래서 한 소절 부르고 가만히 있었더니 사람들이 제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줄 알더라구요. 당시 이혼 직후이고, 그 노래가 첫사랑인 제 부인을 위해 만든 노래라서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사실은 진짜 기억이 안 나서였는데요. 그래서 무대 공포증이랄까, 과연 노래를 제대로 할 수 있나 두려워서 콘서트는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왜 갑자기 45일 일정의 전국 콘서트를 결심했습니까.
“2년 전, 세시봉 콘서트 때 우연히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렇게 마음이 뿌듯할 수가 없어요. 고향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음악이 내 고향이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이란 걸 그때 깨달았죠. 그날 이후로 매일 1시간 정도 기타 연습을 했습니다. 공연과 상관없이 음악을 되찾고 싶어서요. 그러다 지난 12월에 미국에 있을 때 콘서트 제안을 받았는데 66세에 콘서트를 하기가 쉬운가, 이것도 참 근사한 일이다란 생각에 수락을 했어요. 콘서트를 앞두고 두려움과 설렘이 가득합니다. 팬들이 실망할까봐 굉장히 열심히 노래와 기타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너’의 마지막 절은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입니다. 손가락 바닥 부분으로 슬쩍 터치만 하면 절로 켜지는 스마트폰을 쓰고 연인과도 쉽게 만나 쿨하게 헤어지는 요즘 젊은이들이 ‘그건 너’의 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동전을 넣고 힘들게 다이얼을 돌려 걸던 공중전화기는 사라졌더군요. 저도 아이폰을 쓰는 걸요. 그런데 기자회견 때 찾아온 젊은 기자들, 이 노래를 부를 때 태어나지도 않은 기자들이 제 노래를 처음 듣지만 다른 후배들이 리메이크한 노래를 들어봤다고 해요. 컴퓨터로 만든 아이돌의 음악만 듣다가 생목소리로 하는 제 노래가 오히려 신선하다고도 하고요. 아마 제 콘서트에는 젊은이들보다는 제 또래의 어른들이 제 노래를 듣던 청춘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오지 않을까요.”

음악계에선 ‘기인이자 전설’로 기억됩니다. 1970년대 초반에 콧수염을 기르고, 빨간 가죽재킷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죠. 또 구어체의 가사와 독특한 음률까지 파격적인 노래는 군사독재시대에 숨막히던 청춘들에게 자유와 일탈의 쾌감을 선사했습니다. 음악평론가 신현준씨는 ‘그건 너’가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처럼 ‘지성의 사색’이란 여과도 필요 없이 그냥 몸에 꽂히는 효과였다. 구어체의 생생한 가사, 필요할 때마다 터져주는 후렴구, 음치 같지만 강렬한 가창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가 흐른 뒤의 맥빠진 음악평론식 해석일 뿐이다.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기운을 겉치레 없이 순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한 것은 이장희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이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엄혹한 70년대 초반에 어떻게 그런 도발(?)을 했나요.
“그게 참 우연이에요. 제가 친구와 싸우다 입가에 상처가 난 것을 감추려고 콧수염을 길렀고요, 오토바이를 타려면 라이더 재킷을 입는 게 어울렸거든요. 또 제가 팝송을 좋아했는데 그 가사들이 대부분 ‘Hey, Ya’ 등 평소 말하듯 하는 노랫말이어서 새롭게 시도한 겁니다. 청년문화의 기수 등도 작가 최인호씨가 어느 신문에 콘서트를 본 리뷰를 쓰며 만든 말이고요. 평론가들이나 남들이 의미를 붙여주고 입혀준 옷일 뿐입니다.”

청년층에서는 사랑받았지만 박정희 대통령 당시 노래들이 대부분 방송 금지곡이 됐죠.
“그 이유가 좀 어이없었어요. 남에게 핑계를 댄다(그건 너), 불륜이 암시된다(불꺼진 창), 음주를 권한다(한잔의 추억)는 등이 금지 사유였으니까요. 너무 답답해서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고, 콘서트 역시 1974년 이화여대 강당의 무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친구인 기타리스트 강근식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우리들이 앙드레 김이 만들어준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섰답니다.”


가요계는 왜 떠났나요.
“1975년 가요정화 운동으로 노래들이 금지되고 또 그해 12월에는 인기연예인 80여명과 함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철창신세를 졌어요. 구치소에 있는데 굉장히 창피하더군요. 대중에게 사랑받는 가수가 이 무슨 꼴인가 싶어 가수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친구 권유로 ‘반도패션’ 지점을 운영하며 옷장사로 돈을 벌었고 사랑과 평화, 김수철, 김완선 등 후배가수들에게 노래를 만들어주었지만 당시 국내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미국으로 떠났죠.”

미국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잖습니까.
“레스토랑도 잘 되었고 한인방송국도 성공했죠. 미국 취업비자를 얻기 위해 한인 라디오에 DJ로 일했는데 1988년에 앞으론 미디어사업이 유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본과 인력이 적게 들고 나름의 노하우도 갖고 있는 라디오를 선택했죠. 이전에 있던 교민방송은 미리 신청을 해야만 들을 수 있었는데, 스튜디오를 빌리고 AM주파수를 사서 LA지역이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했더니 교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교민사회의 대소사, 온갖 민원과 문의와 토론과 오락, 나아가서는 교민의 의견까지 라디오코리아로 모아졌거든요.”

1992년에 가수가 아닌 방송사 사장으로 귀국해서 교포들의 상황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했을 때 참석했습니다.
“1992년, 미주한인 이민역사상 최대 수난이라고 알려진 LA폭동 기간 중 ‘라디오코리아’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구조활동을 하며 상황실·대피소·자위대 본부역할을 했어요. 당시 부시 대통령이 직접 라디오코리아 스튜디오를 방문해 동포들에게 격려와 담화문을 발표했고 대통령 공로장도 주더군요. 교포들의 소식이 궁금하실 것 같아 한국에 와서 기자회견을 했죠. 아, 그것도 20년 전 일이네요.”

그 잘나가던 방송국을 왜 갑자기, 정말 홀연히 그만두었나요.
“2003년 12월 31일로 라디오코리아를 물러났습니다. 제 나이 55세였죠. 전파를 임대한 중국계 방송국이 당시 월 18만 달러의 전파료를 35만 달러로 올려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더군요. 그들의 치사한 요구를 들어주기 싫었어요.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늙기 전에 은퇴하고 싶어서 순식간에 접었죠. 방송국은 승승장구하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매일 아침에 출근하면 20가지 이상의 문제와 숙제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조금만 더 회사를 키우자고 견디면 영원히 발목이 잡힐 것 같아 핑계삼아 순식간에 문을 닫았습니다. 원래 50세가 되면 은퇴해서 여행만 하고 살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진 거죠.”

그렇게 무엇이건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드라큘라’란 영화를 보고 한 달 동안 잠을 못잤어요. 드라큘라가 아니라 드라큘라 때문에 죽은 이들의 죽음이 두려워서죠. 언젠가 나도 죽는구나, 내가 죽으면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 인생은 한 번뿐이란 사실에 전율하며 결심했죠. 난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 결정대로만 살거다…. 물론 그래서 잃은 것도 많고 후회도 하지만 결국 제 인생의 주인공이자 결정권자는 저니까요.”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죠. 그래도 전세계를 여행하고, 울릉로에 집도 짓고 괴산의 농업학교에 입학하는 등의 일을 하려면 돈이 많아야잖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다음에 돈 많이 벌면 아내랑 크루즈여행도 가고, 시골에 텃밭도 가꾸며 살겠다’란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들과 좀 다른 것은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지요. 그게 큰 차이를 만듭니다. 문제는 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라 뭘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 것인지가 중요해요. 지금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만 해서는 정작 큰돈이 생겨도 못떠나요. 뭐든 해봐야 노하우도 쌓이고 재미도 커지거든요. 남들은 제가 굉장한 부자인줄 아는데 아니에요.”

조영남씨를 비롯한 지인들이 ‘진짜 사나이’라고 하고, 또 ‘영원한 수컷’이라는 표현도 합니다. 그렇게 바쁜 세시봉 멤버들이 이 선생이 부르면 다 모인다면서요.
“그건 아마 제가 그동안 미국에 살아서 자주 못보니까 희소성 덕분에 제가 연락하면 모이는 거겠죠. 저를 보러 와준 친구들이 고마워서 밥을 사니까 사나이란 덕담도 듣고요. 전 남자친구들끼리 어울려 노는 것이 재미있어요.”

울릉도 홍보대사이기도 한데, 울릉도가 정말 천국인가요.
“전세계 곳곳을 다녀보니 울릉도만 한 곳이 없어요. 다들 아름다운 풍광을 꼽을 때 바다, 산 등을 말하는데 제 집 뒤가 산이고 앞은 호수거든요. 공기도 맑고…. 사람들이 파도치면 못들어가고, 큰 병원도 없는데 불편해서 어떻게 사냐고 하지만, 병원 가려고 그 동네에 사나요. 적당히 불편해서 더 좋습니다. 얼마 전까지 더덕 농사도 지었는데, 아무리 천국에 살아도 농사는 힘들더군요. 반나절만 밭일해도 허리 아프고…. 그래도 이 나이에 천국 같은 울릉도를 베이스캠프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고 특히 올해는 전국 콘서트도 하니 정말 전 복많은 노인입니다. 핫핫핫.”

이장희씨는 정말 복이 많다. 그가 운영하던 의류대리점을 그만두자마자 그 회사가 망했고, LA에 살던 큰 집도 팔자마자 불경기가 닥쳐 집값이 떨어졌단다. 반면 울릉도에 정착한 후에는 그를 찾아온 이들이 많아 울릉도 땅값은 올랐다. 돈도 돈이지만, 친구들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그보다 더 많은 팬들이 그의 노래를 통해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지순한 복인가. 그런데 곰곰 생각하면 하늘이 준 복이라기보다 그가 먼저 행동해서 얻은 복이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