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ㄱ
가을비 소리 ㅡ 서정주
그 젖은 단풍나무 ㅡ 이면우
ㄴ
내장산 단풍 ㅡ 고두현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ㅡ 이기철
너라는 단풍 ㅡ 김영재
노인과 단풍잎 ㅡ백거이
늦단풍 ㅡ 장철문
ㄷ
단풍 ㅡ김창균.류근삼.박가월.백석.송상욱.신현정. 안도현.유치환.
이사라. 이상국. 이자규. 이제하.임영준.
단풍나무 ㅡ 유진택. 함성호
단풍나무 길에 서서 ㅡ 장철문
단풍나무 한 그루 ㅡ 안도현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ㅡ 이영광
단풍놀이 ㅡ 방우달. 서정춘
단풍 드는 날 ㅡ 도종환
단풍들의 합창 ㅡ 허동인
단풍 숲속을 가며 ㅡ 오세영
단풍을 보면서 ㅡ 조태일
단풍의 이유 ㅡ 이원규
단풍편지 ㅡ 이제인
단풍, 혹은 가슴앓이 ㅡ 이민우
ㅂ
붉은 잎 ㅡ 류시화
ㅅ
속단풍 든다 ㅡ 이명수
ㅇ
열매 도둑 단풍 도둑 ㅡ 하종오
오매 단풍들것네 ㅡ 김영랑
ㅎ
한 그루 단풍나무의 잠 ㅡ 이은유
햇빛과 단풍 ㅡ 김규화
가을비 소리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불국사
그 젖은 단풍나무 이면우
내장산 단풍 고두현
낙타의 혹을
베자
화산이 폭발했다
오, 내장을
가득 메우는
저 용암.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이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을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생은 피우는 만큼 불게 핀다고
너라는 단풍 김영재
이제 너의 불붙은 눈 피할 수 없다
감춰야 할 가슴 묻어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누가 막는다해도 저문 산이 길을 트고 있다
노인과 단풍잎 백거이(당나라)
늦가을 찬바람 을씨년스런 나무
술잔 손에 든 쓸쓸한 노인
취한 모습 서리 맞은 나뭇잎 같아
불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
늦단풍 장철문
서른 두 가마니 참숯을 들이부었다
뻥 뚫린 풍구와
대장장이의 얼굴이 서쪽으로부터 발그레하다
단풍 김창균
그대를 밀며 산에 오른다
산협을 돌아가는 나도
그 곁 아슬아슬
절벽에 평생을 건 너도
다 햇볕이 건너뛴 자리마다 붉다
긴 빨대 같은 길
잘게 믹서된 인간을 서서히 빨며
산은 점점 붉은 피를 수혈하는데
누군가의 뒷 몸을 밀고 가는 나는
단풍 아래서 아프다
마을에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생의 절정을 건너뛰던 무당처럼
저 원색의 잎들은
제 몸에 주문을 걸며
嚴冬까지 견딜 것인데
또, 산 아래 마을에서는
길고 푸른 작두날을 타는
날이 있겠다
<유심> 2008년 가을호
단풍 류근삼
개마고원에 단풍 물들면
노고단에서도 함께 물든다
분계선 철조망
녹슬거나 말거나
삼천리 강산에 가을 물든다
단풍1 박가월
너의 죽음이
국민장이 되는구나
기껏 여름 몇 푼의 그늘
업적은 미비한데
화려한 장례식에
명산은 문상하느라
온 나라가 북새통이다
단풍 백석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느뇨
빨간 정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즐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사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개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단풍 송상욱
이브의 죄를 씻은
몸뚱아리가
꽃처럼 붉어
가을 날
붉은 소문이
하늘을 타고 오른다
그날
능금나무 아래
불칼을 맞고 쓰러진
땅이 붉어
속살이 뜨거운 나무 위에
천둥소리 번져와
붉은 신들이 춤을 추고 있다
단풍 신현정
저리 밝은 것인가
저리 환한 것인가
나무들이 지친 몸을 가리고 있는 저것이
저리 고운 것인가
또 어디서는 짐승이 울고 있는가
어느 짐승이 덫에 치인 생채기를 핥고 있는가
저리 뜨거운 것인가
단풍 안도현
보고싶은 사람 때문에
먼 산에 단풍
물 드는
사랑
단풍 유치환
신이 주신
마지막 황금의 가사를 입고
마을 뒤 언덕 위에 호올로 남아 서서
드디어 다한 영광을 노래하는
한 그루 미루나무
단풍 이사라
그 여자 단풍드는 여자
어머니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그 시간 단풍드는 시간
죽음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그 입술 단풍드는 입술
침묵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그 몸 단풍드는 몸
詩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죽을 줄 모르는 죽음으로
살 속의 물과 꿈, 긴 속삭임 다 쏟아내고
내 속에 뼛가루 꽃나무를 꼿꼿하게 세운다
로마 테베레 강
단풍 이상국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잎잎이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봄에 겨우 만났는데
가을에 헤어져야 하다니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단풍 이자규
알겠네, 기다리지 않아도 편지는 도착하고
계절의 중력은 몸을 낮추어 녹슬어가네
비워질 세상을 이미 알고나 있었는지
이동설계를 긋고 있는 다람쥐는
나무숲 사이를 굴러다니다 떨어져 죽은 동료의
두 귀를 세우네, 들리는가
흐느끼는 안개를 달래며 옆구리를 내주고 있는 절벽의 끝
멀리 누군가의 발에 채인 돌들
부서지며 뒹굴고 서로 부둥켜 안고
서로 상처 핥는 소리 들리는가
장대비 때려 아름다워진 삶의 무늬
칼바람 맞은 몸일수록 뒤척이지 못한 혓바닥
참 붉다, 뜨겁게 제 피멍든 살껍질
일어나 한시절 시뻘건 참회 벌이고 있네
서러움과 아쉬움이 만나서 독버섯이 된 가슴
뼈가 짓이겨진 그리움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이명처럼 들려오는 강물소리 번개 섞는 소리
내 활화산의 중심에다 구멍을 내고 싶어라
알겠네, 타오르는 것은 언제나 내일과
어제 사이에서 그 존재가 되어가네
단풍 이제하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처럼 뒤채며 일어서던 목숨이
어찌 볼 수도 없는 허공에서 아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불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생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 끝에서 하늘 끝에서
되돌아 아득아득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 곬으로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 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잡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단풍 임영준
앞날이
순탄치 않아
혹독하게
몰아치리라
예감하고들 있어
분기탱천한 구월이
피를 토하는거야
단풍나무 유진택
잘 익은 단풍나무
이곳에 안기고 싶대요
한없이 햇살만 달라 손벌리는 산골에서
분홍물로 젖고 싶대요
분홍물로 젖어 절명하고 싶대요
이보다 더 잘 익어
온 산천 분홍물로 물결칠 때까지
끝까지 남아 산주인이 되고 싶대요
외로운 산주인 되어
철없는 아이의 손에 통째로 꺾이고 싶대요
통째로 꺾이면서도
다만 잔잔히 웃음 짓고 싶대요
단풍나무 함성호
지나가네 지나가 버리네
그가, 그녀가, 당신이 ㅡ
그냥 지나가 버리네
여기
너무 오래 단풍나무 아래서
그를, 그녀를, 당신을 기다렸네
설레는 손짓은
단풍나무 잎사귀처럼
붉게 물들어가고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로
사랑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골몰한 생각들이 스치고
그냥
지나가 버리네
먼 훗날
그는, 그녀는, 당신은
어느 차가운 바위에 앉아
말하겠지
그 때,
(단풍나무 그늘에서)
쉬어가야 했다고
우리가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쳐 온 생의 기별들이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로
차곡 차곡 쌓이고 있네
단풍나무 길에 서서 장철문
단풍 나무 한 그루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이영광
단풍놀이 ㅡ 무덤6 방우달
예측한 일이지만, 무르익은 갈바람이 불어오자
흠뻑 눈물 머금은 잎들은 밤내 울어버린 것이다
눈으로만 운 게 아니라
가슴으로 팔다리로 발바닥까지
온몸으로 울긋불븍한 빛깔을 흘릴 것이다
맹물로만 운게 아니라
소금의 짠맛도
산새의 구슬픈 노래도
아래로 아래로 지는 바람도 함께 버무려
기나긴 골짜기를 타고
우수수 몸부림치며 흐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름답다고
벌떼같이 산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단풍들은 그것이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잎들은
해마다 가을이면 한꺼번에 울어버리는 것이다
단풍놀이 서정춘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일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들의 합창 허동인
얘들아
울긋불긋
노래하는
저 단풍들을 좀 보아라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어도
한데 어울리니
합창이 되고 마는구나
이젠
흙으로 돌아가도 좋다며
하늘에도 감사
땅에도 감사
바람에게도 감사
그동안 베풀어 준
모든 이들의 은혜
노래로써 보답한다며
색깔로써 드러내는
저 단풍들의
사부 합창
오부 합창을
얘들아
귀는 두고 눈으로만 보아라
단풍 숲속을 가며 오세영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 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옇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벼랑의 꿈> 시와 시학사. 1999년
단풍을 보면서 조태일
내장산이 아니어도 좋아라
설악산이 아니어도 좋아라
야트막한 산이거나 높은 산이거나
무명산이거나 유명산이거나
거기 박힌 대로 버티고 서
제 생긴 대로 붉었다
제 성미대로 익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니더라도
낮고 충충한 바위하늘도 떠받치며
서러운 것들
저렇게 한번쯤만 꼭 한번쯤만
제 생긴 대로 타오르면 될거야
제 성미대로 피어보면 될거야
어린 잎새도 청년 잎새도
장년 잎새도 노년 잎새도
말년 잎새도
한꺼번에 무르익으면 될 거야
한꺼번에 터지면 될 거야
메아리도 이제 살지 않는 곳이지만
이 산은 내 산이고 니 산인지라
저 산도 내 산이고 니 산인지라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을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단풍 편지 이제인
불현듯 다녀가라는
편지 받고 씁니다
포기할 수도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먼 허공의 거리
그 아득함을 글자로나마
채우겠다는 것인지
쓰고 또 지우고 씁니다
하늘허리를 두르고도
남을 빈 말들의 행렬
다시 한 자 한 자 지워 나갑니다
마지막 남은 한 문장
화석이 된 붉은 시간의 잎들
그대 가슴에도
그 불멸이 자라고 있겠지
오늘밤은
꼭 그대 거기
붉게 물든 한 그루 단풍나무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단풍, 혹은 가슴앓이 이민우
가슴앓이를 하는 게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대낮부터
낮 술에 취할 리가 없지
삭이지 못한
가슴 속 붉은 반점
석양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마침내 노을이 되었구나
활활 타올라라
마지막 한 잎까지
아쉬워 아쉬워 고개 떨구기엔
가을의 눈빛이 너무 뜨겁다
붉은 잎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ㅁ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 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 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속단풍 든다 이명수
단풍 때문에
가을 한철 술에 젖어 살았다
화양동 계곡 너럭바위에서
계룡산 민박집 층층나무 아래서
함양 읍내 선술집에서
마시고 또 마셨다
혼자서, 여럿이서 노래를 불렀다
ㅡ앞남산 황국단풍은 구시월에 들고요
이네 가슴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든다
노래를 불러도 가슴이 시리다
젊은 날엔 술기운을 못 이겨
얼굴이 단풍 빛깔이었는데
나이 들면 술기운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일까
사시사철 붉은 미친 단풍 때문에
내 속의 그 요물 때문에
요즘엔 시시때때로
속단풍이 든다
열매 도둑 단풍 도둑 하종오
며칠 만에 돌아와 집 안 둘러보니
풀들이 밟혀 작은 길 생겨나 있다
그 새로 난 작은 길 가보니
은행나무 아래서부터
감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대추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뒤란 둔덕까지 가서 멎어 있고
나무마다 가지에 열매 하나 없다
우리 집에는 대문이 없는 데도
올해도 누가 집 뒤에 트럭 대놓고 들어와
대추와 감과 은행 싹 털어 싣고 갔다
단풍 들 무렵이면
내가 집 나가는 짓거리 알고 있는
이웃이 와서 한 짓거리 아니라면
해마다 때 잘 맞출 순 없는 법이지만
혐의를 품지 않기로 한다
나도 산천에는 대문이 없다는 걸 알고
함부로 이곳 저곳 드나들며
나무들이 잎에 맺은 색깔들 눈독 들여와서
마음에 한 자리 깔았으니 피장파장 아닌가
그 새로 난 작은 길 발자국 맞춰 걸어보니
내 걸음 너비와 똑같다
<현대시학> 2004년 3월호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한 그루 단풍나무의 잠 이은유
한 그루 단풍나무 잠을 잔다
잎 피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단풍나무 무성하게 자라도 부러움이 없다
내가 잘 자란 단풍나무 곁에서 감탄한다
그래도 한 그루 단풍나무 잠을 잔다
내 마음이 단풍나무에게로 다가간다
잘 자란 단풍나무 단단한 뿌리를
잠자는 단풍나무한테 옮겨 심는다
단풍나무 내 마음에서 자란다
내 마음이 잠자는 단풍나무를 깨운다
언제부터인가 단풍나무한테서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잘 자란 단풍나무 닮고 싶은 내 마음이
잠자는 단풍나무에게서 잎새를 피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잠자는 단풍나무 자라는 동안 깨닫는다
내 마음이 잘 자란 단풍나무에게 먼저 간 것이 아니라
잘 자란 단풍나무 나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나를 깨우고자 한 그루 단풍나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단풍나무 내 마음에 전해온다
이젠 내가 단풍나무 마음을 읽는다
햇빛과 단풍 김규화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신사의 가슴에 올려놓는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 속으로 들어와앉는다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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